* 아래 글은 오프라인 마스터링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보통 내향인 분들도 온라인 활동은 상대적으로 편안해 하시더라구요. 성격에 대한 일반화가 담겨 있으니, 보시고 도움이 되는 내용만 취사선택해서 쓰시기 바랍니다.
Intro.
TRPG 마스터링을 룰북을 제일 많이 읽었다는 이유로 얼레벌레 시작했는데, 어쩌다 대유잼 마스터를 보면 어쩐지 주눅이 듭니다.
배우 뺨치는 NPC 연기와 멋진 제스쳐, 연출, 시의적절한 유머, 이 모든 걸 뒷받침해주는 자신감과 에너지. 와, 진짜 몇 번을 생각해도 너무 대단한데, 나는 저렇게는 도저히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혹시 내향인도 노력하면 그런 스타일의 마스터링이 가능할까요?
아마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적어도 기본 3~4시간 이상을 진행해야 되는 마스터링에서 자신의 본성과 안 맞는 일을 하면 취미가 아니라 스트레스가 될 뿐입니다.잘 안 맞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잖아요. 우리는 우리 스타일대로 마스터링을 해야 합니다.
1. 내향인 마스터가 해야 하는 한 가지 : 플레이어들의 능동성 끌어내기
TRPG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미리 준비한 개쩌는 스토리입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 '내가 참여해서 어떤 활약을 했고' '그것이 의미 있는 결과가 되었는지'가 세션의 재미에 훨씬, 엄청,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플레이어가 세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내향적인 마스터는 잘 듣고, 잘 반영하고, 깊게 생각하는 것이 강점입니다. 내향인들이 같은 내향인들을 훨씬 덜 부담스러워하고 덜 기빨려 하는 것도 어쨌든 강점이죠. 우리는 소외되는 기분이 어떤지도 알아요. 이 강점을 살려서 플레이어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2. 능동성을 이끌어내는 구체적인 방법
그럼 대체 어떻게 능동성을 이끌어내면 좋을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대학 시절 교양 심리학에서 배운 틀을 하나 가져와보겠습니다.
어떤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톱을 물어뜯는 행동'에는 '초조한 기분', '시험 기간'이라는 원인이 있고, 손톱을 물어뜯고 나면 '기분이 좀 가라앉'거나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우울'해지는 등의 결과가 있습니다.
"플레이어의 능동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를 바꿔 주어야 합니다. 아래에는 그렇게 바꿀 수 있는 예시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장면제 룰(시노비가미, 마기로기, 인세인)의 경우 룰적으로 개인별 장면과 사명을 부여하는 방법을 쓰는데요, 이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인(선행사건) - 행동 - 결과
원인(선행사건)
- 정보를 제공할 것(플레이어의 능동성이 마스터를 난처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주고, 룰이나 시나리오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서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넓혀주어야 합니다. )
- 심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을 조성할 것
- 참여가 적은 플레이어에게 구체적인 질문하기, 반응 요청하기
- 보다 적극적으로 연기하고, 연출하기(목소리 연기를 잘 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플레이어들이 마스터를 보고 본인 플레이에 대한 힌트를 얻기 때문입니다.)
행동
이 부분은 플레이어의 몫입니다만, 혹시 플레이어가 어려움을 겪는다면 관찰과 질문을 통해 이유를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결과
- 변화에 열려 있을 것(플레이어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갈 준비가 늘 되어있어야 합니다.)
- 탐사자의 백스토리와 행동을 스토리에 반영해줄 것 (플레이어의 행동이 이 세계에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 플레이어의 능동적인 행동을 불가피하게 막아야 한다면, 이유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할 것
3. 내향인에게 흔한 문제들 극복하기
- 불안과 자신감 부족
이 부분은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불안을 준비 노력으로 승화하여 철저히 준비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세션 하는 동안만은 내가 세계 최고의 마스터라고 믿으세요.
- 즉흥적인 말하기, 임기응변
우리는...즉흥적인 말하기에 취약합니다. 우리도 미리 준비하면 충분히 말하기를 잘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별 준비 없이 유창하게 발표를 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쉽게 최고의 효과를 내는 방법은 도입부를 신경 써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외 강조해야 하는 재미있는 장면을 더 준비하면 좋지만 기본적으로 TRPG 세션은 대화이기 때문에 전체를 발표처럼 힘주어 준비할 필요도 없고 해봤자 준비한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임기응변은 그 시나리오와 등장인물의 기본적인 특성과 행동원리에 기반해 개연성이 높아 보이는 쪽으로 하시면 됩니다. 시나리오에 적혀 있지 않다면 그 부분은 마스터 마음입니다. 마음가는대로 그냥 합시다.
- 체력 부족
보통 우리는 운동을 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을 좀 꼼꼼히 준비하세요. 보통 마지막 장면은 복잡한 전투씬과 격렬한 감정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체력이 가장 떨어졌을 때 제일 힘든 걸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리 준비할수록 편해집니다.
- 적절한 통제하기
경험이 부족해 과도하게 통제하거나 방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욕구를 버리고, 이야기가 지루해지거나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에는 적극 개입하세요.
4. 세션 준비 미세 팁
1) Cheat sheet, 참고용 컨닝페이퍼 준비하기
헷갈리는 룰, 분위기 조성용 멘트, 주요 NPC 특성, PC 이름과 중요한 백스토리, 그 외 시나리오와 관련된 주요 사항을 미리 메모해둡니다. 이름 없는 NPC에 바로 이름을 붙여주기 위한 이름 목록을 적어둬도 좋습니다.
세션 중에는 세션 내 시간의 진행이나 적의 체력, 마력 소모, 탄환 소모 등을 여기에 기록해둡니다. 시간의 진행은 간과하기 쉽지만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이 대략 몇 시인지, 캐릭터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대응하기 쉬워요!
2) 모방하기
모방할 수 있는 다른 마스터의 장점들은 모방합니다. 플레이어와 눈을 자주 맞춘다거나, 소리와 크기의 높낮이를 조절해서 강조할 부분을 강조한다거나, 지겨운 부분을 자연스럽게 넘어간다거나 하는 부분들이요.
3) 실패해도 전진하기
'판정에 실패해서 단서를 못 얻고 끝나는 것'은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패해도 전진하라'는 말이 나왔고, 부정적인 결과와 함께 단서를 얻게 만드는 테크닉이 있습니다만...
말이 쉽지, 단서를 주면서도 적당한 대가를 마스터가 즉흥적으로 생각해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 부분도 미리 목록을 만들어서 위의 컨닝페이퍼에 적어둘 수 있습니다. 아래는 예시입니다..
- 물건을 잃어버린다.
- 본인이나 친구가 적의 위협에 노출된다.
- 캐릭터가 기이한 행동을 한다.
- 단서가 일부 훼손되어 있거나 잘못된 정보를 알게 된다.
- 감염이나 독 때문에 치료하지 않으면 지속적인 피해를 입는다.
- 불리한 거래를 해야 한다.
- 어려운 선택에 직면한다.
- 단서가 들어 있는 무서운 환상을 본다.
- 캐릭터 백스토리 내용과 연관된 문제가 발생한다.
-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단서를 그냥 주고, 한참 뒤 적절한 때에 부정적인 대가를 준다.
Outro.
저는 아기 때부터 낯선 사람이 집에 오면 집에 갈 때까지 울었던 내향인으로서 꽤 여러가지 극복 노력을 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이후부터는 모든 수업 발표에 자원했고, 피치 못할 상황에서 한시간 만에 준비해서 100명 앞에서 레크레이션 MC 대타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당시 정말로 죽고 싶었습니다만, 그래도 잘 끝났습니다)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에 다른 부서장께서 저를 데려가기를 원하셨던 적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누군가와 말을 하거나 남 앞에서 이야기할 때 강한 신체적인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낯선 사람과 그냥 대화만 해도요.
'내향성'이 없어지지는 않더라구요^^;;
마스터링 할 때도 당황스러운 순간도 많고, 어려운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즐겁습니다. TRPG 마스터는 내가 빛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이 더 빛나야 하는 이야기잖아요? 제게는 내 재미를 적당히 찾아먹으면서 응원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당연한 말만 썼나 싶고 그렇지만...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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