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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사악한 도시 / 유용한 배경 지식 한 스푼

이 글은 제가 크툴루의 부름의 베를린 배경 책인 "Berlin: Wicked City"(이하 베를린:사악한 도시) 를 플레이하려고 짧게 요약한 배경지식 모음입니다. 베를린: 사악한 도시는 주로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며, 책에 실린 시나리오 세 편도 기본적으로 각각 1922년 여름, 1926년-1928년, 1932년 겨울을 무대로 합니다. 

 

주요 출처는 제가 독일사 교양 수업에서 배웠던 짧은 지식(주로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기반), 피터 게이의 <바이마르 문화>,  베를린:사악한 도시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TRPG 플레이를 위해 야매로 요약한 내용이니 이 글로 역사 공부를 하시면 안 됩니다! 

 

 

역사

대전쟁(Great War)이 끝나다

WWI: Soldiers in Merville, France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참전한 모든 강대국은 단기에 이 전쟁을 끝낸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꿈은 금새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전쟁은 긴 시간 동안 막대한 숫자의 병사들을 참호에 끊임없이 투입하는 소모전이 됩니다. 전쟁 초기, 애국심과 낭만적인 감정으로 입대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습니다. 인류가 처음으로 겪어 보는 대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 모든 물자가 동원되면서 군인이 아닌 사람들도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독일에서만 민간인 약 50만 명이 영양 부족과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산층 조차도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범죄나 매춘에 손을 댔고, 그 결과 사회적인 규범과 가치가 크게 변했습니다.

 

마침내 1918년 독일이 무조건 정전을 제안하면서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면서 연합국에 영토의 13%(알자스로렌, 폴란드 회랑, 슐레스비히홀스타인 등)를 몰수당했고, 엄청난 배상액을 지불하기로 약속했으며, 가혹한 군축을 겪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일인들은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고 베르사유 조약을 증오했습니다.

 

"표현할 수 없는 낙담, 마치 정신의 모든 생기가 죽어버린 듯한"  - 베르사유 조약 관련, 케슬러 백작의 일기(1919.6.22)

 

우익의 주된 선전은 이러한 강요된 평화를 받아들인 죄인들은 처벌되어야 하며, 조약은 파기되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또, 독일군은 전쟁에서 지지 않았으며, 국내의 배신자인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게 등을 찔렸을 따름이라는 음모론인 배후중상설(Dolchstosslegende)을 퍼뜨렸습니다. 좌익들도 현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혁명을 시도했으며, '이성적 공화주의자'들도 나치를 증오했지만 공화국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뒤에서 찔렸다', 음모론 프로파간다

 

1919년에는 좌익이(스파르타쿠스단), 1920년에는 우익이(카프 폭동) 혁명을 시도했으며, 암살과 거리 싸움, 시위는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의 법조인들은 좌우에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좌익분자들이 일으킨 암살 사건 22건 가운데 17명은 엄벌, 10명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우익 극단주의자들의 354건의 살인 중 한 건만이 엄벌을 받았으며 그것도 사형은 아니었습니다. 참고로 좌익의 평균 형량은 15년, 우익은 4개월이었다고 합니다. 

 

바이마르인들은 트로이의 목마를 도시 안으로 가져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제작을 지켜보고 그 설계자를 자진하여 숨겨주었던 것이다. -피터 게이, 바이마르 문화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한 1918년에도 정말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원한 사람은 없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받아들인 사람조차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조차도, (온건 우파의 시각에서는) 사회 혁명이나 볼셰비즘이나 무질서보다는 나은, (온건 좌파의 시각에서는) 프로이센 제국보다는 나은 어설픈 차선책으로 여겼을 뿐이다.
- 에릭 홉스봄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8년에 태어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국가의 수상이 되었을 때 끝났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정치적 격변이 지속되고, 경제는 불안정했으나, 이견의 여지 없이 문화가 만개한 시대였습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에 있었던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 의사 마그누스 히르슈펠트는 성에 관련된 연구를 하면서 성소수자 권리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를 썼고, 발터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건축양식을 만들었습니다.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썼고,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 형제도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였습니다.
  • 영국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베를린을 여행하고 퇴폐적인 카바레 장면이 담긴 <베를린이여 안녕>을 썼습니다.
  •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를 썼습니다.
  • 알반 베르크, 쿠르트 바일, 아놀드 쇤베르크의 무조 음악이 콘서트장에서 들렸고, 영화관에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탐구하는 표현주의 영화들-<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노스페라투> 그리고 <메트로폴리스> 같은 영화들이 걸렸습니다.
  • 하이데거는 <존재의 시간>을 출판했습니다.

 

푸른 천사(1930),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바이마르 제국의 짧은 연표

 

1922년, 연합국은 독일의 배상금 지불이 연체되고 있다고 발표합니다. 그러자 독일 정부는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화폐를 계속해서 발행합니다.

 

1922년 임명된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는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은 수정할 필요가 있지만, 조약을 이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소련과의 조약 체결로 미움을 사 암살됩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했다는 것을 구실로 루르 지방을 점령합니다.

 

1923년에는 초인플레이션이 만연하여 빵 한 쪽을 사거나 편지를 보내려면 조 단위 마르크가 필요해졌습니다. 부르주아들은 모든 저축을 잃었습니다. 이는 이미 심각하던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불신을 더 심화시켰습니다. 

 

1923년 11월, 새로운 마르크인 '렌텐마르크'가 발행되면서 초인플레이션은 종료됩니다.

 

이후, 대공황이 전세계에 몰아닥치는 1929년 10월까지  '비교적' 평화로운 황금의 20년대가 옵니다. 그러나 극단주의자들은 좌우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공황에 의해 실업률이 치솟고, 폭력이 빈발하기 시작합니다.

 

1933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독일의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멸하게 됩니다.

 

레세르 우리Lesser Ury, 카페 앞에서 (1920년대)

 

 

베를린

나는 무엇보다도 베를린 여인의 빠르고 재치 있는 응답을 사랑했고, 극장에서, 카바레에서, 거리에서, 찻집에서 만난 베를린 관객의 날카롭고 명확한 반응을 사랑했으며, 무엇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건조하지만 상쾌하고, 냉랭하지만 차갑지 않은 공기를 사랑했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활력, 일에 대한 애정, 모험심을 사랑했으며, 역경을 감수하면서도 계속 기꺼이 살아가려 하는 마음을 사랑했다.
- 빌리 하스, <문학세계Die literarische Welt>

날씨

베를린은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은 0도 전후로, 5월까지 쌀쌀합니다. 비는 많이 오지 않으나 꾸준히 옵니다. 1년 내내 회색 하늘을 볼 수 있으나 여름은 맑고 화창합니다. 눈은 12월에서 2월까지 오지만 많이 쌓이지는 않습니다.

이동수단

지하철 2개 노선과 트램, 택시와 버스가 있었습니다. 도시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철도가 가장 편리하지만, 차량이나 비행기도 가능합니다. 런던에서 매일 여러 곳을 경유해서 베를린으로 오는 항공편이 있었습니다. (베를린 슈타켄 비행장) 파리나 로마에서 온다면 템펠호프 비행장으로 도착합니다. 택시 외에도 삼륜 자전거(2인까지 탑승 가능)도 있습니다.

미디어와 통신

전신, 라디오, 신문, 영화 등이 다 있습니다. 이 시기는 저널리즘의 황금기로, 일간지 60개, 주간 및 월간지 630개가 있었습니다. 영문으로 된 신문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우체국이 있었고, 우체국 안에 공중전화 부스도 있었습니다.

주거

주요한 건축 스타일은 네오 바로크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리바이벌이었지만 모던한 건축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주거용 건물들은 발코니와 테라스가 있었으며 보통 화분이 나와 있었습니다.

 

좋은 호텔들은 중앙 난방, 전등, 개인 욕실, 엘리베이터와 식당이 있었습니다. 조식은 요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860년대부터 건설 붐으로 만들어진 연립 주택은 일반적으로 5층 높이에, 치장 벽토로 전면이 마감되어 있으며, 연결된 복도와 소방 규정에 맞는 작은 안뜰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리에 면한 아파트는 가장 고급스럽지만, 안쪽으로 갈 수록 앞뒤로 침실이 있고 중간에 주방과 공용 공간이 있는 신발 상자와 비슷합니다. 7개 중 1개만이 개인 화장실과 욕실이 있으며, 2/3는 욕실 시설이 전혀 없이 계단참에 있는 화장실을 씁니다. 1/5의 임차인은 너무 가난해서 시간 단위로 침실을 임차합니다. 아파트에는 호실 번호가 없습니다.

먹고 마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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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설명된 음식들(Senfeier, Hoppel Poppel, Kartoffelpuffer, Pfannkuchen)

Senfeier(삶은 계란과 감자), 아이스바인(자우어크라우트와 곁들여 먹는 돼지고기 요리), Hoppel Poppel(남은 고기 등으로 만든 계란 캐서롤), Kartoffelpuffer(감자 팬케이크), Schweinsfilet mit Parmesan(파마산 치즈를 곁들인 포크커틀릿) 등을 먹었습니다. 베를린 사람들은 송아지 고기를 좋아했습니다. 사이드 디쉬 중에서는 첫 요리로 콩 수프가 인기가 좋았습니다. Pfannkuchen(구멍이 뚫리지 않은 베를린식 도넛으로, 안에 잼이나 마멀레이드가 들어 있다)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베를린은 시민 280명 당 식당이 1개 있었습니다. 참고로 뉴욕은 433명당 하나였습니다. 외국 요리 식당도 많았으며, 특히 혁명 이후 러시아 식당도 많이 열었습니다.

 

카페는 대부분 유럽 테라스 스타일로, 보도 근처에 테이블이 놓여 있었습니다. 커피, 브랜디, 티케이크나 애피타이저를 팔았습니다. 밤늦게까지 영업했습니다.

 

바, 나이트 펍, 카바레가 성업했습니다. 특히 카바레는 베를린의 상징적인 유흥거리였습니다. 

베를린의 타락

매춘부들이 마약상에게서 코카인 캡슐을 구매합니다

전쟁 중 매춘은 절박한 여성 또는 남성의 생존수단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존경받는 베를린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매춘은 도시의 지하 경제와 문화에 자리잡았습니다. 베를린의 에로틱한 야간 유흥 장소에 대한 가이드북이 판매되었으며, 약 500개 정도의 . 남성, 여성,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계층을 위한 시설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베를린은 마약거래와 암시장의 허브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카바레와 정통 극장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베를린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지하 문화와 융합했습니다. 댄서이자 배우인 아니타 베르베르는 에로틱한 공연, 코카인 중독, 변덕스러운 행동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총기 소유는 1928년까지 완전히 금지되어 있으나 역설적으로 암시장에서 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재미있게도 런던 사람들의 1/5, 뉴욕 사람들의 1/3이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갔지만, 베를린 사람들은 1/20만이 교회에 갔다고 합니다.

 

 

어떤 캐릭터를 플레이할 것인가?

정치적인 입장, 베를린에 온 이유, 단골 가게, 다른 탐사자와의 관계 외에 1차대전에 대한 사항을 중요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을 어떻게 보냈는지?

위의 역사 파트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시대는 전쟁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시대입니다. 본인의 캐릭터가 복무를 했는지, 어디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민간인으로서 전쟁에 대해 어떤 경험을 했는지, 신체적 정신적 피해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독일 외 국적

어떤 국적의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1920년대의 베를린입니다. 전세계의 사람들이 학술, 수집, 관광, 범죄, 예술, 취업 등 다양한 목적으로 베를린에 올 수 있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빈곤해진 중산층 독일인, 동유럽 이민자, 러시아 혁명 후의 망명자들(왕정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등), 소련 스파이, 유대인, 놀러 온 프랑스인, 영국인, 미국인, 스웨덴인, 일본인 등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샬로텐부르그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아 농담조로 '샬로텐그라드'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